지난 1월 30일 서울 성북구 사회적경제센터 강당에 4개월의 교육과정을 마친 새내기 모델들이 늘어섰다. 그러나 20대 가이난 60~70대 어르신들이다. 손주를 돌볼 나이지만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빨간 레드카펫을 깐 ‘런웨이’를 당당하게 걸었다. 모델이 된 부모를 보러온 가족의 응원과 박수 소리가 이어지고 이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시니어 모델 교육과정을 마친 후 홈쇼핑, 방송 출연이나 CF 모델 등에 활동한다. 최근 시니어 모델을 요구하는 시장이 넓어지면서 이들을 길러내는 전문 교육기관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05년에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모델이나 연기교육 등을 가르치는 ‘뉴시니어 라이프’에는 그동안 약 1300여명이 수강생들이 졸업했다. 물론 이곳을 찾는 이들 중엔 80대도 적지 않고 50대면 “젊다”는 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노인들을 상대로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패션 업계에서 30년 넘게 일한 구하주(69·뉴시니어라이프) 대표는 시니어 패션쇼를 시작한 계기를 묻자, “사회지도층은 과연 진정으로 노인들이 바라는 일을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며 반문했다.
구 대표는 10년전쯤 요양원을 방문했다가 코와 입에 호스가 꼽혀 의식이 없는 노년의 환자들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고 했다. 가족들은 의사의 말만 듣고 돈만 주는 모습에 눈물마저 났다고도 했다. 구 대표는 가족을 위해 열정적으로 산 그들이 노년이 돼서 대접받고 편하게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평생 가슴에 쌓인 한(恨)을 풀지 못하고 노년기를 맞아 질병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전공인 패션디자인을 살려 노인들이 예쁜 옷을 입고 무대에 서게 하면 그 한이 풀릴 것 같았다고 했다.
지난 2006년 9월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국제 실버박람회에서 우리나라에서 첫 시니어 패션쇼가 열렸다. 당시 32명의 지원자를 모집했는데 무려 280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구대표는 가슴속에 한이 많은 노인들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예상외로 너무 많은 지원자들이 모이자 그녀는 상세이력서를 받아 가정환경과 학력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리고 근사하고 멋진 사람보다 오히려 살면서 외모나 가정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소외계층을 위주로 모델을 뽑았다. 주변 업계 사람들은 패션모델이라고 하면 근사한 사람들을 뽑아야지 왜 뚱뚱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뽑았냐며 의아해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이 깊은 사람부터 먼저 풀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구 대표는 “같은 또래가 당당하게 하이힐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참가자중 최고령인 시니어 모델 박양자(89)씨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젊은 세대한테는 미안하다”며 “우리가 오래 살면서 2세, 3세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옛날사람처럼 가족에 기대기보다 홀로서기를 위해 다니고 있다”고 했다.
50대 중반으로 이곳에서 젊은이 축에 속하는 김종렬(54)씨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열심히 했다. 아이도 잘 키워야 했고 노후대책도 해야 했다”며 “50세가 넘다 보니 평생 일만할게 아니라 다른 의미를 찾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