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서울 동작구에 거주하는 유정숙(84)씨가 요양등급을 받기까지 어려웠던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유씨는 지난해 병원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요양등급 신청에서 탈락하고 재신청까지 3개월의 유예기간을 둘 것을 통보받았다
"'얘, 나도 만두 좀 줘. 나도 주라, 제발.' 이렇게 사정하면서 테레비를 마구 두들겼어."
서울 동작구에 거주하는 유정숙(84)씨는 지난해 3월 정신이 혼미해졌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골반뼈가 부러진 채 홀로 집에 갇혀 일주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유씨는 '먹방'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TV 속 개그맨에게 만두를 달라고 애원했다. 급기야 모니터를 두들기다가 진이 빠져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때마침 유씨를 구조한 사회복지사가 유씨를 지속적으로 돌봐줄 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노인장기요양등급을 신청했지만 담당 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두 차례 등급 부여를 거절했고 그때마다 재신청을 3개월 뒤에나 하라고 못박았다. 더구나 이런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공단 측은 유씨의 병원 방문 이력을 들어 '최근 병원에 다녀왔으니 걸을 수 있는 거 아니냐'며 현실을 도외시한 단순 논리를 내세웠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일상생활을 혼자 꾸려가기 힘든 노인을 지원한다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 취지에 비춰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이며, 실제 등급 심사 과정에서 이런 무성의한 대응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불의의 사고로 못 걷는데 요양 신청 거부
27일 유씨 측에 따르면 유씨는 지난해 3월 중순쯤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져 다리를 크게 다쳤다. 다친 다리에 통깁스를 한 유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발을 짚고 화장실을 가다가 또 넘어져 골반이 부러졌다.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기초생활수급자인 유씨는 비용 부담에 뼈가 붙길 기다리며 자리보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있는 아들마저 태국에 있어 돌봐줄 사람이 없다 보니 종일 굶다가 기력이 쇠해졌고 급기야 눈을 떴다가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상태가 위독해질 즈음 이웃으로부터 사정을 전해 듣고 집을 찾아간 김재영 사회복지사가 유씨를 돕기 시작했다. 유씨는 결국 통증 때문에 전혀 걸을 수 없게 됐다.
김 복지사는 곧바로 건보공단에 유씨에 대한 요양등급을 신청했다. 등급을 부여받으면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신체활동 및 가사활동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단 관계자는 등급 산정을 거부했다. 최근 내원한 기록이 있다는 게 유일한 이유였다. 공단 측은 "택시가 병원 바로 앞에서 내려준다고 해도 노인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며 "짧게나마 걸을 수 있을 테고 내원 후 나아질 여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골반뼈 골절에 따른 통증 때문에 복지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다녀온 것이라고 해명해도 공단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더구나 공단 측은 재신청을 할 거면 3개월 뒤에 하라고 통보했다.
다시 혼자 지내게 된 유씨는 사설 요양보호사의 힘을 빌려야 했다. 1시간에 1만2,000원가량을 지급해야 해, 요양보호사를 하루 1시간만 불러도 한 달 치 기초생활급여의 절반 이상이 빠져나갔다. 그마저도 쓰지 못해 아예 굶어야 하는 주말이 오면 유씨는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다.
▲걸을 수 없는 유씨의 발과 발목이 퉁퉁 부어올라 있다. 유씨는 지난해 9월 가까스로 요양등급을 받아 8개월째 요양사 지원을 받고 있다
6개월 만에 등급 받았지만… 멸시에 또 상처
재신청도 한 차례 거절당한 끝에 유씨는 골절 사고 후 6개월 만인 지난해 9월에야 요양등급을 받았다. 유씨는 그 과정에서 조사원으로부터 숱한 무시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불친절한 명령조로 '기어 봐라' '이거 가져와 봐라' 하더라. 그걸 따르면서 상태를 증명해야 하는 심정이 참담했다." 유씨가 조사원에게 "지난번에 왜 나를 (요양등급 심사에서) 떨어뜨렸냐"고 묻자 그는 "글쎄요"라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건보공단의 고압적 태도는 요양등급을 부여한 뒤에도 여전했다고 한다. 평일 하루 3시간 제공되는 요양 서비스를 토요일에도 받고 싶다는 유씨의 요청에 조사원은 "이 좁은 집에 무슨 할 일이 있다고 사람을 쓰냐"며 "평일 3시간을 2시간으로 줄이면 되지 않느냐"고 받아쳤다. 요청 이유를 설명하려 하자 조사원이 "가만히 있으라"며 소리치기도 했다는 게 유씨의 주장이다.
지침 세세하지만 현장 준수는 '글쎄'
전문가들은 유씨의 사례를 두고 요양등급 심사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을 표시한다. 현행 체제에서 조사원이 '장기요양인정점수'를 매기려면 대상자 집에 방문해 신체기능, 인지기능, 행동변화, 간호처치, 재활 등 영역별로 세부항목을 하나하나 평가해 조사표에 기입해야 한다. 세부항목은 장애 판단부터 환복・양치질・체위 변경 가능 여부까지 신청자 상태를 구체적 수준까지 판단할 수 있게끔 설계됐다. 그러나 정작 이런 지침이 현장에서 정확히 이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제도는 미비한 형편이다. 심지어 조사원이 대상자 집을 방문하지 않은 채 등급 심사를 한다고 해도 공단이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요양등급 조사원이 지침을 모두 무시하고 임의로 등급을 판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A(70)씨는 황반변성 증상으로 시력을 잃었는데도 걸을 수 있다는 이유로 요양등급 신청에서 탈락했다. 앞을 보지 못하니 '식사하기' '방 밖으로 나오기' 등 조사표 항목 중 상당수에서 불가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도, 조사원이 '걸을 수 있으니 웬만한 건 가능할 것'이라는 주관적 판단을 앞세워 등급 신청을 반려했다는 것이 A씨 측 주장이다.
조사원이 심사 대상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매뉴얼이 없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현장에 나온 조사원들의 몸에 밴 불친절과 고압적 태도 때문에 심사 받는 과정에서 불쾌감이나 굴욕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건보공단을 비롯한 당국이 현행 노인요양등급 판정 절차를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제도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건보공단이 장기요양인정점수 등 수차례 개선을 거친 검증된 판정 도구를 중심으로 요양등급을 산정하도록 관리해 조사원의 임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